촘스키의 아버지 윌리엄 촘스키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였다. 촘스키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언어학에 흥미를 느꼈다. 언어학자였던 촘스키는 후에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지식인의 책무’는 촘스키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라는 책에서 촘스키는 인터뷰 도중 언어학과 정치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라고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에 대한 촘스키의 의견에 관심이 갔다.
촘스키는, 물론 자신이 정치에 대해 투쟁하며 이야기를 하고 주어진 상황을 판단, 분석하지만 이러한 것은 양심적인 지식과 판단력 즉, 양식이 있다면 고등학생이라도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자신이 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지적 능력을 키워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며 분석하는 것이 곧 높은 지적 수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이런 점에서 자신이 현실을 잊고 언어학에만 몰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것이 더욱 창조적이고 지적으로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석만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바른 ‘양식’을 잃게 될 것이다. 또한, 현실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 없이 지적인 만족감만을 추구한다면 탁상공론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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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 ‘촘스키와의 대화를 시작하며’에서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한 언급을 했었다. 하지만 살고 싶은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그러한 언급이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꽤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각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나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의 자기합리화와 모순을 감추려는 의도는 마치 자연스럽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세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간혹, 그러한 세계를 그리는 사람들은 철이 아직 덜 들었다고 치부되기도 한다. 밥 굶게 생겼는데 무슨 유토피아 이야기를 하느냐는 핀잔아닌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같은 인물을 한번 보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눈 앞의 이익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삶은 진정 잘 사는 삶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소크라테스 당시에도 권력과 결탁해 일정한 위치를 누리며 그저 편안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이란 없다. 그들은 그저 과거 어느 시점에 살다 죽은 수많은 사람들일 뿐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비록 사형을 당해 죽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바로 이러한 차이이다. 이러한 차이를 발견해내어 살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
진짜 이상은 현실과 배치되지 않으며,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러한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제임스 러셀 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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